♡♥(소감 글)))/혜초의 왕오천축국전

왕오천축국전 전시 관람

자연생각 2011. 2. 14. 11:13

"혜초의  왕오천축국전 친견기"
학교다닐때~
(국교때는)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은 이승만, 
유엔사무총장은 함마슐드--
(중학때는)  역사시험을 앞두고~   
혜초의 왕오천축국전-- 하고 외우던~
그 신라의 승려 "혜초"가  쓴 "왕오천축국전"이
1283년만의 귀향으로 세계 처음으로 공개된다는 
매스컴을 보고 관심이 쏠려 관람하였다! 

왕오천축국전은 단순한 불서(佛書)가 아니라,

혜초가 723~727년 동,서,남,북,중앙의 다섯 천축국(인도의 옛 이름)과

페르시아 중앙아시아 등 서역지방의 사회, 풍습, 종교등을 기록한 여행기다.

 

한국인이 쓴 최초의 해외 여행기인 이 글은 두루마리 필사본으로,

현재 남아 있는 부분은 총 227행에 5893자, 폭 42cm, 총길이 358cm이다.

 

 

"왕오천축국전"은 7세기 현장법사의 "대당서역기"[명나라 때 오승은(吳承恩)에 의해 서유기(西遊記)라는 소설로도 각색],

13세기 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

14세기 이븐 바투타의 "여행기"와함께 세계 최고의 여행기로 평가받고 있다.

 

프랑스인(폴 펠리오)이 중국 둔황에서 발견하여 현재 프랑스에서 소유하고 있는 현실이 안타깝다!

혜초는 719년 15세때 신라 경주에서 중국에 도착하여 스승(인도 출신 밀교승 금강지와 그의 제자 불공)을 만나 4년간 밀교를 배우고, 스승의 권유에 따라 19세때인 723년, 인도를 향해 광저우를 출발하였다.

 

 

뱃길로 인도의 불교 8대성지를 둘러본 후,

다시 육로로 페르시아 중앙아시아를 지나 당의 수도 장안까지 2만Km를 여행했다.

 

"왕오천축국전"은 그 4년(723~727년)에 걸친 대장정의 기록이다.

 

 

"왕오천축국전"에는, 혜초가 4년 동안 여행을 하면서 고향땅 경주를 그리워하였음이 시로 나온다.

 

여행에서 돌아온 그는 당나라에서 활발하게 활동하여 존경받는고승으로 그의 일에 전력을 다하였으며,

그는 780년 76세의 나이로 입적했다.

현재 시안에는 "신라국고승 혜초기념비"가 세워져 세계인 혜초의 흔적을 기리고 있다 한다.

 

 

중국 광저우에서 뱃길로 인도를 거쳐 지금의 이란까지~  그리고 세계의 지붕인 파미르고원을 넘어 
타클라마칸(들어가면 나올 수 없는 곳의 의미)사막을 건넜던 사실은~
 
동양에서  아시아대륙의 중심부를 혜초보다 먼저 해로(海路)와 육로(陸路)로 일주하며
견문기를 남긴 사람은 없다고 한다.

그의 여행길은 실크로드를 관통했다.
실크로드는 중앙아시아의 오아시스를 경유하는 길이다.

산악지대의 빙하나 눈이 녹아 흘러 형성된 오아시스는  실크로드가 이어진 중심이다.
즉 실크로드는 오아시스루트로 통함이 새삼스럽게 인식됐다.

 

실크로드의 주요교역물인 비단은 단순한 옷감이 아니라 국가나 개인의 최고선물로

통화를 대신하는 지불수단이였다 한다. 

 

비단은 금과 동일양으로 교환되었으며특히 로마인들은 너무나 좋아했다 한다

이 실크로드를 통해 신라까지 서역의 문물이 전해졌음이

경주에서 발견된 유리그릇이나 석조제품중에 서역의 격구(폴로)모양이 발견됨이 말하고 있었다.,

 

당시 신라의 지배층은 금이나 보석보다 유리그릇을 더 귀하게 여겼다 한다!

유리는 유라시아 최고의 인기 교역상품 가운데 하나로 이 유리제품들은

경주에서 다시 바다를 건너 일본의 나라지역까지 넘어갔다.

 

실크로드를 넓게보면, 로마에서 경주, 일본까지 연결되었다고 할 수 있었다! 놀랍다!

 

 

가끔씩 TV드라마에서 보이는 당시 왕족들 옷이 시대적으로 볼때,

너무 화려하지 않나하는 의구심을 가끔씩 갖고 있었으나,

전시된 옷감을 보니 현재에 못지않게 당시의 문양이나 색감이 너무나 고급스런점에 놀랐다!

 

또한 당시의 불상등 조각품과 장식물등의 섬세함에도 크게 감명받였다!

왕오천축국전이 발견된,둔황은 중국의 서쪽 영토가 끝나고, 서역이 시작되는 실크로드의 관문으로서

오래 전부터 크게 번영을 누린 곳이다.

 

그러한 번영의 상징이 바로 명사산 기슭의 둔황 천불동인데,

둔황을 오가던 대상들은 여행의 안전을 빌기 위해 석굴을 조성하고 각종 불화를 그곳에 그려 놓은 것이다.

 

 

1908년 2월 25일 프랑스 동양학자인 펠리오가

 실크로드의 요충지인 중국둔황의 막고굴에 도착하여 왕오천축국전을 찾아내어

프랑스국립도서관으로 보낸후 1909년 5월 이사실을 학계에 보고하고,

 

1915년 일본인 학자 다카구스 준지로는 헤초가 신라 승려라는 사실을 밝혀냄으로

한국최초로 세계적인 여행기를 쓴 "혜초'의 업적이 전세게에 알려지게 된 것이다!  

 

발견자 폴 펠리오는 베트남 하노이 극동학교를 졸업했으며 중국어를 모국어처럼 구사하고

위구르어 러시아어에도 능숙하였으며 해박한 동양학 관련 지식, 동양 문화에 대한 열정덕분에

그는 한눈에 왕오천축국전을 알아볼 수 있었다고 한다.

 

 

왕오천축국전이 공개전시되는 것은 세계처음이고,
프랑스국립도서관밖으로  나온 것도 이번이 처음이란다!


혜초가 727년에 이글을 완성했고 2010년 12월 이 땅에 돌아왔으니 1283년만의 귀향인 셈이다.

이번전시는 4월3일까지 국립중앙박물관에서 하고 있으나,
왕오천축국전은 대여조건(3개월)에 의해 3월 중순까지 전시를 한 후
3월17일에 프랑스로 먼저 돌아간다고 한다!

또한 왕오천축국전은 대여조건에 의해 총길이 358cm중에서 약60cm만 펼쳐 놓은채 전시중이다.

아쉬움이 있을 뿐이다!

 

 

"왕오천축국전"전시의 관람은 본인에겐

 

1. 실크로드(Silk Road)가 오아시스를 따라 루트가 형성되었고

 

2. 그 교역의 길은 멀리 로마에서 서역국가들을 거쳐 둔황(Dunhuang), 장안 그리고 신라, 일본까지 연결선상에 있었음이 당시 세계화(世界化)의 분위기가 짐작 되었고, 따라서 그옛날 선인들이 낯선 외국땅을 찾아 문물을 익혀 온 대단함도 짐작되었다!

 

3. 혜초의 인도와 둔황을 찾은 루트가 뱃길과 육로라는 점에 관심이 더욱 갔고, 혜초는 한국인 최초의 세계인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4. 왕오천축국전이 단순한 불서(佛書)가 아니라 사회, 풍습등을 기록한 여행기임이 새롭다.     

그동안 혜초와 왕오천축국전에 대해선 역사책에서 배웠으나 대체로 단편적인 지식을 갖고

있었다.     

 이번 세계최초의 전시로 그 진면목을 알수 있는 기회였다!     

 

몸으로 직접 체험한 현장감이 살아있는 글이 특징으로, 여행거리의 시간과 방향, 왕의 이름,     

언어와 기후 풍습, 왕소유의 코끼리 수, 종교적 성향등을 생동감있게 적었다는 내용이 감동이었다!

 

5. "왕오천축국전"이 현장법사의 "대당서역기", 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 

     14세기 이븐 바투타의 ""여행기"와함께 세계 최고의 여행기로 평가받고 있는 점이 자랑스럽다.

 

 

6. 현시대에도 실크로드를 따라 여행함이 많은 불편이 있고 큰 용기가 필요하다고 생각드는데,     

 더욱이 당시 가기도 쉽지 않았지만 갔다가 돌아오기도 어려운 곳인 천축을     

그 옛날 약1300년전에 여행을 한것은 오직 "투철한 도전정신"과 "구도(求道)정신"이 만들었을 것이다.


7. 이번 관람은

      "왕오천축국전"이 둔황의 굴속에서 , 더군다나  많은 여러 두루마리문서중에서
     프랑스인 폴 펠리오에 의해 발견되었고,

     일본인학자(다카구스 준지로)가 "혜초가 신라인"임을 알아낸것은
     그들의 높은 학구열 때문임을 생각할때 존경심이 우러나온다!


   모든일에 있어서 "도전의식은  성공의 열쇠" 임이 뇌리에 차오르며~
    되새겨 봄직하다고 생각되어 이 글을 정리하여 보고 있다!

    잠시 잊고 있었던 역사적 우리자랑을 새로 접하니  정말 감격스럽습니다!

(2011. 2. 11)

(정리: d.s.Lee)


  (위는 오아시스가 있는 월아천 전경이다)


▲월아천은 명사산 안에 있는 초승달 모양의 호수다. 거대한 모래언덕 사이의 지반이 함몰된 부분이다.
그렇게 크지도 않은 월아천은 심한 강풍이 불어도 모래에 덮인 적이 없고
무려 1000년 동안 마르지 않았다는 사실이놀라울 따름이다. 모래바람으로 건물 지붕위가 뿌옇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