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폼페이전(국립박물관) 2015.1.29

자연생각 2015. 1. 31. 17:48

 

(남산) 국립 중앙박물관에서

 

(폼페이 전시) 2015.1.29

 

서기 79년 고대도시는 어떤 모습이었을까? 고대 로마제국의 도시 폼페이(Pompeii)는 우리가 실제로 마주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고대도시다. 79년 베수비우스산 화산 폭발로 화려했던 도시 폼페이는 화산재 속으로 묻혀버렸고, 18세기 중반에서야 발견됐다. 화산재를 걷어내니 화산 폭발 직전까지 존재했던 고대인의 모습과 화려한 문명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폼페이 유적은 1997년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됐다. 

 

 

[폼페이 소개]

 

1.폼페이의 도시 풍경과 일상

기원전 80년에 로마제국으로 흡수된 폼페이는 도시 곳곳이 재정비되어 신전과 공공건물, 대저택이 건설되었다. 특히 기원전 70년에 지어진 원형경기장에서는 검투사 경기가 열렸고, 대극장에서는 연극 공연이 열려 사람들에게 볼거리를 제공했다.

2.대저택에서의 삶과 예술

폼페이의 대저택들은 입구의 짧은 복도를 지나면 집 내부가 보이도록 설계되었다. 집은 아트리움(atrium)이라는 천창이 붙은 공간과 정원을 중심으로 그 좌우에 방들이 배치되었다. 집의 안쪽에 위치한 정원은 수도 시설과 연결된 분수를 비롯해 멋진 조각품들로 장식하였다. 각 방의 벽에는 신화를 주제로 한 그림, 아름다운 풍경이 펼쳐진 것 같거나 실제 기둥이 서 있는 것 같은 착각을 일으키는 그림 등이 그려져 있었다.

3.아름다움의 추구

남성에게 허락된 유일한 장신구가 반지였던 반면에 여성들의 장신구는 종류가 매우 다양했다. 머리에는 머리띠나 금으로 된 그물 장식을 하거나 다양한 모양의 머리핀을 비롯하여 목걸이, 팔찌, 반지 등의 장신구가 있었다. 이 외에도 화장품을 담았던 다양한 용기들도 남아 있어 아름답게 보이고 싶어 했던 당시 여인들의 모습을 추측해 볼 수 있다.

4.폼페이의 경제활동

항구도시이자 상업과 농업의 도시였던 폼페이는 바다를 끼고 있어 다른 지역과의 교역이 용이하였고, 베수비우스 지역의 비옥한 토양에서 자란 포도로 만든 와인은 폼페이의 주요 소득원이자 수출품이었다. 이밖에도 타일, 등잔, 도자기 생산과 더불어 섬유 산업으로도 유명해서 이와 연계된 신발을 만드는 공방과 염색 공방, 상아나 금속 제품을 파는 가게도 있었다.

5.폼페이 사람들의 식생활

폼페이 시내 길거리에는 다양한 식재료들이 판매되고 있었고, 곡물을 빻아 만든 빵을 만들어 판매하는 상점들도 있었다. 육류와 생선이 널리 소비되었으며, 이를 활용한 다양한 조리법이 사용되었다.
로마인들의 식탁에는 야채, 과일, 빵 등이 있었는데, 특히 폼페이 유적에서 확인된 화덕과 빵 덩어리로 보아 오늘날과 비슷한 방법으로 만들어졌음을 알 수 있다.

6.신과 숭배 의식

폼페이 사람들이 섬긴 신(神)에는 그리스를 기원으로 하는 신뿐만 아니라, 동양의 신과 고대의 토착신도 있었다. 폼페이 광장에는 주피터(Jupiter)와 그의 아내인 주노(Juno), 미네르바(Minerva)를 위한 신전이 세워졌고, 비너스와 바커스 등 여러 신들의 신전이 도시 곳곳에 세워졌다.
집 안에도 사당을 만들어 축복을 기원하였을 정도로 신들에 대한 숭배의식이 생활 속에 깊이 자리하고 있었다.

7.8.의술과 장례문화

폼페이에서는 다양하고 근대적인 형태의 수술 도구들이 발견되어 당시의 수술 기술이 상당히 발전되어 있었으며, 몇몇 수술 도구는 지금도 사용되고 있을 정도로 놀라울 만큼 복잡하고 정교하게 만들어졌다.
폼페이 도시 성벽 외곽에는 무덤들이 많이 확인되고 있는데, 법으로 도시 내에서는 무덤을 만들 수 없었기 때문이다. 시신은 그대로 매장하거나 화장을 하였는데, 화장할 때는 타고 남은 재를 유골 항아리에 수습하였다.

9.최후의 날

기원후 79년 8월 24일 폼페이는 사라져 버렸다. 그날 베수비우스 산이 막대한 양의 화산재와 용암, 유독가스를 뿜어내며 갑작스럽게 폭발하여 폼페이와 함께 주변 도시들을 완전히 삼켜버렸다. 당시의 상황은 폼페이의 화산폭발을 직접 목격했던 소(小) 플리니우스(Plinius the Younger)가 당시 상황을 자세하게 기록한 두 편의 편지로 잘 알 수 있다.
당시의 참혹한 죽음의 모습은 캐스트로 확인할 수 있는데, 전시된 쭈그린 채로 손으로 입과 코를 막고 있는 남자의 캐스트와 밀려드는 화산재를 막기 위해 엎드린 채 옷으로 얼굴을 가린 여자의 캐스트는 죽음의 순간을 그대로 말해주고 있다.    

(상기설명 출처: 로마제국의 도시문화와 폼페이전 도록 )

 

 

(검투사의 투구)

 

 

[전시회 소개 기사] 출처: 국민일보 기사

전시에는 폼페이에서 출토된 조각품, 벽화, 장신구, 캐스트(화산재 속 빈 공간에 석고를 부어 당시 죽은 사람이나 동물의 모습을 재현한 석고상) 등 300여점이 선보인다.

유물들은 이탈리아 폼페이·헤르쿨라네움·스타비아에 고고문화유산관리국과 나폴리국립고고학박물관에서 대여했다. 이날 언론 공개 행사에 참석한 마시모 오산나 폼페이고고문화유산관리국장은 “폼페이 유적 발굴은 아직도 진행 중”이라며 “현재는 발굴된 유적의 보존 처리에 초점을 맞추고 있으며, 아직 발굴되지 않는 곳은 후세대를 위해 남겨놓으려고 한다”고 말했다. 

국립중앙박물관은 폼페이 유물들을 도시 풍경과 사람들의 일상, 대저택에서의 삶과 예술, 아름다움의 추구, 최후의 날 등 8개 주제로 구분해 전시했다. 전시실에 들어서면 검투사 투구와 정강이 보호대가 눈에 들어온다. 폼페이는 정원이 딸린 귀족 별장이나 부유층 저택이 많은 도시였고, 검투사 경기장 등 여러 공공건물들이 건축돼 있었다. ‘황금팔찌의 집’이라고 불리는 대저택의 응접실에 있었던 벽화 ‘정원벽화’도 눈길을 끈다. 길이 10m에 높이 5m에 달하는 초대형 프레스코 벽화다. 

여인들이 사용했던 금속 장신구와 화장품도 전시됐다. 한 금속 팔찌에는 ‘노예에게 주인으로부터’라는 글자가 안쪽에 적혀 있다. 다양한 신들의 조각상과 정원 장식품, 장례풍습을 엿보게 하는 유골함과 비석, 부장품 등도 볼 수 있다. 만 15세 미만은 들어갈 수 없는 ‘에로티시즘’ 코너도 작게 마련돼 있다.

전시장의 마지막에는 폼페이 최후의 날을 보여주는 캐스트들이 펼쳐진다. 쭈그린 채로 손으로 입과 코를 막고 있는 남자의 모습이나 엎드린 채 옷으로 얼굴을 가린 여자의 모습 등은 79년 8월 24일 폼페이를 멸망시킨 화산 폭발의 순간을 생생하게 전해준다.

 

 

이탈리아 폼페이 발굴지 현장 방문(2005. 6.21)

(폼페이 현지) 2005.6.21

서기79년 화산폭발이 일어난 베스비오스(Vesuvius)산이 옛 도시 발굴지 뒤로 보인다.

 

 

(2005.6.21)폼페이, 이탈리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