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 5. 14. 02:01ㆍ(사진 수강 Note·주요선생님)/일반 인물사진(김완모선생)
1. 계절적 그리고 날씨중요(비온뒤 촬영 적격)
2. 달은 가장 오래된 시계다.
3.Equipvalent (등가물)
4. 구름으로 심리묘사(알프레드 스티글리츠)
5. 폴 스미스: Paul Smith (우표 많이 ems tkwls/ SMITH 라는 자기이름이 들어가는 사진 많이 찍음) / 컵에 안경 끼운 사진 :인상적임
6. 사라문; 델피르를 도운 친구들 중 한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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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알프레드 스티글리츠 (Alfred Stieglitz 1864 ~1946)
오랫동안 우리는 알프레드 스티글리츠(Alfred Stieglitz)를 현대사진의 위대한 선구자로 기억하고 있다.
물론 그가 남긴 사진사적 업적을 일일이 예를 든다면, 그는 거장임에는 틀림없다.
그러나 이것만 가지고는 그의 사진작업을 제대로 평가했다고 말하기 어려울 것이다.
사진은 발명되면서 사진으로서의 고유한 예술적 영역을 지녔던 것은 아니다.
회화가 이미 시각예술의 교과서로서 굴림하고 있었고 근대산업사회의 출현과 더불어 예술의 상업성과 정치성은 순수예술과 비 순수예술의 경계를 구분하고 있었다.
후발주자로 그 역사가 미천한 사진은 스스로가 예술의 한 형식으로서 인정받기위해서 당연히 회화의 미학적 요소를 그 모범적 모델로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회화는 오랫동안 자신의 영역이라고 믿었던 시가적묘사의 정확성과 창작물로서의 권위를 사진에 의해서 침범 받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것은 경제적인 측면에 있어서도 회가들을 위협했다.
초창기 사진가 중에서도 상당부분 상업적으로 성공한 이들은 대게 삼류 화가였음을 보더라도 우리는 대충 그 당시 순수예술을 위한 낭만주의 예술의 위기감은 짐작할 수 있다.
19세기말 대중사회의 출현은 곧 예술의 대중화로 직결되었고 그것은 값싸고 편리하며, 대중의 욕망에 부합하는 세속적인 형태로의 변질이었다.
‘보들레르’가 그토록 사진의 예술성에 부정적이었던 것은, 그 대표적인 예가 된다.
그때 당시의 사진은 회화의 형식을 추구했고, 또 회화에 접근할수록 예술적 사진이라는 인식이 컸다.
이러한 사실은 사진이 그 스스로가 예술이 아님을 입증하는 것과 같았다.
이러한 사실은 사진예술가들 사이에서 서서히 자각하게 되는 분이기가 만들어지는데, 그것은 사진의 독자적인 미학을 구축하는 것 이였다.
즉 모더니즘사진이 싹트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나 전전으로 회화로부터 벗어난 것은 아니어서 사진의 독자성을 어떻게 형성하고 표현할 것인가에 대한, 구체적인 방법론은 제시되지 못했다.
1880년대 후반에 스티글리츠는 유럽의 각종 회화주의 사진 살롱 전에서 많은 상을 수여받으며, 주목을 끌기 시작한다.
그때의 상황을 그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그 당시 회화예술은 뭔가 잘못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왜냐하면, 나의 초기의 작품을 본 화가들은 그 들의 그림보다, 내 사진의 표현이 더 낫다고 하면서도, 사진이 기계로 만들어졌다는 이유를 내세워 사진은 예술이 아니라고 말한 점이였다.
왜 화가들은 손으로 만들어졌다는 이유로 월등하다는 대접을 받아야 하는가?
그 때부터 나는 이 와 같은 상황에 맞서서 싸우기를 시작했다.
즉 사진이 새로운 표현수단으로 인정되고, 다른 예술과 동등한 존재권을 획득하도록 의식적으로 투쟁을 개시했다.”
이처럼, 스티글리츠와 똑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는 당시의 많은 회화주의 사진가들은 사진이 예술로서 인정 받기위해서 단결하고 투쟁해야만 했다.
그래서 주류에 낄 수 없었던 사진은 각종 단체와 협회를 결성하고 국제 연례 전람회(The Linked Ring Club)를 개최한다.
이 전람회의 명칭을 살롱 전으로 부르게 된 것 또한, 회화에 대한 지나친 열등의식에서 비롯되었음은 자명하다.
즉 사진예술가들은 회화에 맞서서 영국을 중심으로 한, 회화주의 사진을 탄생시켰던 것이다. 회화주의 사진은 사진의 본질적 특성과는 정 반대의 길을 걷고 있었다.
회화주의자들에게 있어 사진은 사진 그 자체의 선명한 재현성 보다는 오히려 그것을 뭉개뜨리고 목탄화나 동판화 혹은 사진이 아닌 그림처럼 재현해 냈을 때 그 사진의 예술적 가치를 더욱 높이 샀다.
따라서 그들의 사진에 있어서는 광선이 확산되고, 선은 부드럽게 처리되었으며 디테일은 재거되었다.
이러한 것들은 결국 인상주의 회화를 표피적으로 모방한 꼴이어서, 회화로부터 벗어나지 못하고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것은 특히 피터 헨리 에머슨이 가지고 있는 자연주의 사진에 대한 견해와는 완전히 상반된 것이었다.
그러다 1880년대에 이르러 새로운 운동이 시작된다.
'피터 헨리 에머슨'은 기존의 회화적인 사진형식을 거부하고 카메라의 특성을 살려 대상을 직접적이고 사실적으로 표현하는 사진을 추구하게 된 것이다.
이것은 회화적인 사진을 추구하던 입장, 특히 오스카 구스타포 레일란더와 헨리 피치 로빈슨의 합성사진 류의 아카데미회화 양식과 지나친 연초점 효과 사진과는 반대하는 최초의 운동이었다.
이러한 피터 헨리 에머슨은 사진 고유의 정당성에 입각한 예술로서의 사진을 탐구하기 시작한 신세대 사진작가들에게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
사진은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20세기로 접어들게 된다.
20세기 초엽, 진보적인 예술가들은 그들이 선택한 매체의 독특한 속성과 특수성에 기반을 둔 새로운 미학을 모색하게 되었다.
“형태는 기능을 따른다”는 것이 그 기치였다.
건축가들은 디자인과 장식에 있어 고전적 건축의 구조를 모방하기보다는 철재 골조의 재질을 그대로 들어내거나 고층건물의 마천루를 만들어 내기도 했다.
조각들은 이제 대리석의 고유한 질감을 인체의 피부로 환원하는 것이 아니라, 돌이 가지고 있는 질감자체를 조각품의 일부로 생각하기 시작했다.
더 이상 대리석으로 미끈한 피부나, 옷감의 짜임새를 흉내 내려고 애쓰지 않았다.
진보적인 화가들 역시 사진에서 새로운 가능성의 시각적 요소를 간파했다.
말하자면 그들은 사진 덕분에 더 이상 모방적 차원의 묘사기능에 충실한 그림을 제작할 필요를 느끼지 않았으며, 그림자체의 본질론적 질문을 하게 이르게 된다.
즉, 입체파와 추상미술은 그렇게 해서 탄생한 것이다.
20세기의 시작은 그야말로 역동적인 시기였던 것이다.
이러한 분이기는 곧 바로 사진에도 밀어닥치는데, 바로 20세기로 접어들면서 사진의 역사를 이야기 하면서 빼서는 안될 인물이 한사람 있다면, 그것이 바로 '알프레드 스티글리츠'이다.
그는 사진분리파를 결성해서 사진의 순수한 기계적 기록성을 되찾자 했으며 렌즈가 본래 갖고 있는 정확하고 정밀한 광학적인 기능을 기본으로 다시 회복하고자 노력했다.
스티글리츠는 1864년 미국 뉴저지에서 태어났다.
스티글리츠는 처음엔 베를린공과대학에서 전기기계공학을 전공했으나, 화학수업시간에 정색유제를 발견한 포겔교수로부터 사진술을 배우게 된다.
그가 본격적으로 사진활동을 시작한 것은 1887년 무렵부터였다.
이 해에 이탈리아를 여행하다 찍은 사진이 런던에서 공모한 현상에 일등으로 당선된 것이다. 이로부터 3년이 채 안 되어 그는 무려 150개가 넘는 메달과 상장을 받을 만큼 사진에 몰입 하였다.
이 당시에 자연주의 사진으로 유명한 피터 헨리 에머슨은 이 공보전의 심사위원이었다.
에머슨과 스티글리치의 만남은 너무도 자연스러운 결과 인듯하다.
실제로 그들이 만남이 있었는지 알 수 없으나, 당시 영국을 중심으로 한 회화주의 사진의 물결에 거의 지도자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었던 그였지만, 그 자신은 예술로서의 사진을 리얼리즘의 문예사조에서 찾고 있던 터라, 스티글리츠의 사진은 에머슨에게 꽤 관심 있게 보였을 것이다.
스티글리츠는 그의 제자이자 전기 작가인 도로시 노만과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독일 유학을 마치고 1890년에 유럽을 떠날 때 나는 꽤나 슬픈 생각에 잠겼다.
외국에 있을 때엔 나의 조국에 대한 갖가지 비판에 하나하나 반론을 폈었다.
왜 그랬냐 하면, 어렸을 적 내 마음 속에 그리던 미국은 서광이 비치는 비전과, 약속된 미래가 있었기 때문이다.
일단 뉴욕에 돌아와 보니 왠지 유럽이 한없이 그리워지게 된 것이다.
자유롭고, 풍요로우며, 자극이 있는 외국에서 생활을 하다가 막상 미국에 돌아와 보니 공백감과 속박감이 엄습해 왔다. 과연 여기에서 나 자신이 잘 살수 있을지 의문스러웠다.”
스티글리츠가 막 돌아온 미국은 당시 문화적으로 유럽에 비해서 매우 낙후되어 있었다.
현대미술의 어떤 흐름도 감지되고 있지 않았으며, 사진 또한 초기회화주의 양식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었다.
그는 먼저 당시의 아마츄어 사진클럽의 회원들을 규합하고 <카메라노트>기관지를 발간한다.
후에 미학적 독자성을 아카데미즘회화의 양식에서 벗어나 사진의 모더니즘 세계로 개척한 스티글리츠의 만남은 묘한 인연이었던 것이다.
스티글리츠는 사실상 당시 미국에서 모더니즘 회화운동의 중심에 놓여 있었다. 그가 만든 뉴욕의 5번가 291번지에 만든 갤러리는 그 규모가 작았음에도 불구하고 유럽의 아방가르드 현대회화를 적극적으로 유치하여, 기획전시하고 있었다.
그때까지 미국의 대중에게는 전혀 알려지지 않은 로댕의 소묘, 마티스의 색종이작업, 세잔느, 피카소의 작업을 소개했으며, 미국의 신진작가들을 발굴하고, 사진분리파(Photo Secession) 운동을 이곳에서 전개한다.
사진분리파 운동을 효과적으로 전개하기 위해 그는 1903년 기관지 '카메라 워크(Camera Work)'를 창간했고, 1905년에는 '291'이라는 화랑을 열었다. 기관지는 1917년까지 간행되었고, 화랑은 사진분리파의 발표무대일 뿐만 아니라 전위적인 미술가들에게도 문을 열어 놓았다. 그리하여 화랑 '291'은 현대사진의 산실일 뿐만 아니라 미국 현대미술의 모태가 되기도 했다. 아무튼 이 화랑은 당시 미국의 전위적인 예술혁명의 진원지로 부각되었다.
우리는 “291”화랑을 사진전문화랑으로 생각하고 있지만 사실상 1910년부터 1913년 까지 그가 조직했던 47회의 전시회 가운데 사진전은 단 세 번뿐이었다는 사실로 미루어 보아 291갤러리를 사진 전문화랑으로 불리기는 어려울 것 같다.
그러나 그는 사진의 현대성을 사진계 내부에서만 보려하지 않고 당시의 커다란 문화사적 변화의 물결에 속에서, 사진도 함께 동등한 위치에서 실험하려고 했던 것이다.
291화랑은 처음 1905년에 에드워드 스타이겐의 협력으로 사진분리파 운동을 전개하기 위한 실험장소로 출발한 것이다. 이 사진분리파 운동은 처음에 유럽에서 문학이나 회화의 문예운동의 하나로 원래 각 장르의 고유한 독특한 특성을 자신의 매체로 표현하는 것으로서 문학은 문학 다화야 하고 회화는 회화 다화야 한다는, 역시 조각은 회화 예술과는 분리해서 조각 작품만이 표현할 수 있는 독립성을 구축하자는 모더니즘 예술의 자율성에 입각해서 각자매체의 순수성을 유지하자는 운동이었다.
바로 이와 같은 정신을 스티글리츠가 사진에 도입한 것이 바로 사진분리파 운동인 것이다. 그러나 사진분리파 운동은 절대적으로 회화예술과 분리해서 표현한다기보다는 당시 유행하던 회화주의 사진의 방향과 다른 입장에서 사진의 예술성을 인정 받으려했다는 점에서 다분히 정치적인 입장이었다.
즉, 다른 장르의 분리파 운동과는 그 성격을 달리하고 있다. 사진분리파 운동은 동시대의 아방가르드 현대 예술의 성격을 띠기는 어려웠다. 오히려 스티글리츠는 사진의 방향을 회화의 미적 규범에서 그 예술성을 모범적인 기준으로 삼았으며, 그 당시 기록 중심의 미국사진가들의 세련 되지못한 사진을 비판했다.
어쩌든 20세기 예술의 방향과 흐름이 모더니즘이라는 절대 절명의 시대적 변화에 스티글리츠는 발 빠르게 움직였고, 사진의 순수예술을 지향하려 했다. 순수사진(Pure Photography)란 다름 아닌 모더니즘 예술의 순수성과 자율성 그리고 독창성이라는 명제에 부합하는 것 이였다.
우선 스티글리츠는 사진의 순수성을 스트레이트(Straight Photography)기법이라는 방법론으로 제시하고자 했다. 사진인화에 그 어떤 가필이나 수정을 가하지 않은 상태에서 사진 그 자체의 광학적이고 화학적인 프로세스를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상태에서 사진의 순성을 찾으려 한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지나치게 사진의 순수성을 좁게 정의 내린 것이고, 이후 순수사진이라는 이름아래 매너리즘에 빠지는 원인이 되기도 한다. 그래서 미국의 스트레이트 사진의 전통적인 계보는 유럽의 아방가르드 사진운동과는 그 혁명적인 힘이 약할 수밖에 없다.
사실 스트레이트 포토그래피가 사진기술을 미적으로 사용한 것과 카메라의 능력의 한계를 아울러 인식한 것 또는 사진을 여타 시각예술의 미학적 원칙의 지도 규칙으로부터 분리해 낸 것은 새로운 발견이라기보다는 사진 그 자체에 대한 처음부터의 전통을 인식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글 : 이 영욱 ( 연변대학교 예술대학 사진과 교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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